by 송우일

기억은 불완전한 것이다. 심지어 변조되기도 한다. 기억을 소재로 하는 몇몇 영화를 보면 기억이란 것을 정말 믿을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들 때도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기억의 효용성은 0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기억을 떠올린다는 것이 과거 경험을 단순히 반복 재생하는 것만은 아닌 것 같다. 대부분의 경우 현재의 필요와 연관되어 있고 때로는 기억에 대해 의미나 가치가 부여되고 재해석되기도 한다.

근대적인 역사 서술 형태가 나타나기 이전, 역사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 형태의 텍스트들은 신화나 전승이었다. 그저 상상 속의 옛이야기일 뿐이라고 가볍게 넘길 수도 있지만 이런 형태의 텍스트들이 수세기에 걸쳐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은 IT 세계 용어를 빌려 표현하자면 풍부한 상상과 재해석의 여지를 주는 ‘확장성과 유연성’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며칠 전 짠 코드도 가물가물한 마당에 20여 년 전 이야기를 끄집어낸 매킨토시(이하 맥) 개발자들에게 그 시절 그 일들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민간전승’이 활자로

『미래를 만든 Geeks』(원제:Revolution in The Valley) 1984년 출시된 첫 번째 맥 개발팀의 일원이었던 앤디 허츠펠드(Andy Hertzfeld, 맥 운영체제의 주요 시스템 소프트웨어 개발자)의 프로젝트였던 folklore.org에 실린 글이었다. folklore.org는 ‘역사적인 한 사건을 여러 사람이 함께 이야기하는(collective historical storytelling)’ 사이트로 그 첫 번째 프로젝트가 맥 개발 일화였다. folklore란 이름 그대로 당시 역사의 한가운데 있던 사람들의 ‘민간전승(傳承)’이었는데 이를 오라일리에서 출판한 것이다(편집 과정에서 앤디 허츠펠드가 생각했던 제목은 『Macintosh Folklore』였는데 오라일리 편집팀의 아이디어로 『Revolution in The Valley』으로 정해진 것이라고 한다). 참고로 책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몇몇 일화들은 빠졌기 때문에 좀더 관심이 있는 독자들은 folklore.org와 책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국내에 수입될 가능성이 없어 보여 미국에 출장 가는 분을 통해 이 책을 입수했다. 책을 받아 펼치자 박물관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때 그 시절 개발진 사진들과 지은이 앤디가 당시에 썼던 노트에 적힌 그림과 메모를 스캔한 사진들, folklore.org에 참여한 다른 필진들의 커멘트 등 나름대로 손색이 없는 ‘1차 사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책은 크게 다섯 부분으로 나눠져 있다. 첫 번째 부분에서는 앤디가 베스트 프렌드인 버렐 스미스(Burrell Smith, 맥의 하드웨어 부분 핵심 설계자, 이하 버렐)를 알게 되고 앤디가 맥 팀으로 옮기기까지의 과정을, 두 번째 부분에는 수차례 중단될 뻔한 보잘 것 없던 프로젝트가 자리를 잡기까지의 이야기들을, 세 번째와 네 번째 부분에는 각각 개발 중후기 일화들을, 다섯 번째 부분에는 열정의 시대의 종언을 다루고 있다.

 

전설의 이면

월간 마이크로소프트웨어 「안윤호의 IT 인물 열전」에서도 몇 차례 소개됐지만 맥 개발은 처음부터 대단한 후광을 업고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1980년 당시 팀원 네 명뿐이었던 이 프로젝트는 그 해 가을에 아예 중단될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노련한 엔지니어와 조직적 마케팅 인력이 투입된 리사와 사라와는 인적 구성도 비교할 수 없었다. 보드 개발자인 버렐은 애플의 서비스 테크니션이었고 핵심 그래픽 컴포넌트를 개발한 빌 앳킨슨(Bill Atkinson)은 리사 팀 소속으로 틈틈이 맥 팀을 돕는 1 2역을 하고 있었다. 개발자들의 매니저 격인 버드 트리블(Bud Tribble)은 휴학중인 대학원생이었다.

승부 근성과 감각을 갖춘 도박사(?) 스티브 잡스(Steve Jobs)가 끼어들면서(비록 원래 팀 리더였던 Jef Raskin이 쫓겨나기는 했지만) 프로젝트는 스티브 잡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추진되고 악전고투를 거쳐 그 유명한 슈퍼볼 시합의 ‘1984’ 광고와 함께 맥은 세상에 그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책 제목과 달리 세상에 혁명이란 것은 일어나지 않았다. 회사 조직이 커지면서 생긴 불협화음으로 인해 앤디와 버렐을 비롯한 맥 핵심 개발자들이 애플을 떠났고 이후 맥 역시 초창기의 인기를 계속 이어가지 못했다.

 

워너비들의 철없는 열정

이 책을 관통하는 일관된 주제는 무엇 하나 변변하게 내세울 것 없는 ‘이들을 움직였던 원동력’에 있다. 앤디가 회상하듯이 그들의 작업은 1960년대의 이반 서덜랜드(Ivan Sutherland) 더글라스 엥겔바트(Doug Engelbart)의 비전, 1970년대의 제록스 PARC 앨런 케이(Alan Kay)의 노력, PC라는 몽상을 꿈꾸었고 실현한 홈브루 클럽의 스티브 워즈니악(Steve Wozniak), 맥 프로젝트를 시작한 제프 라스킨(Jef Raskin)의 연장선에 있고 이들은 모두 그들과 같이 되기를 꿈꾸는 워너비들이었던 것이다.

물론 이 워너비들이 바라던 세상은 오지 않았다. 더욱이 1960~70년대의 비저너리들이 꿈꾸던 세상에 되려면 가야 할 길은 멀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옛 이야기를 다시 꺼내는 이유는 아마도 스티브 워즈니악이 쓴 『미래를 만든 Geeks』의 추천사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이 쓴 글과 그림을 보며, 혁신의 규칙이 돈이 아니라 내면의 보상에 의해 이끌어지던 매우 좋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있었다.

거대기업과 자본으로 공고해진 이 세계에서 지금도 어느 한 구석에는 새로운 워너비뉴비들이 등장하고 있고 역전의 워너비올드보이들 이 해줄 수 있는 이야기는 그들에게 새로운 영감이 될 것이다.

아마도 스토리텔링의 마력(또는 매력)이 무언가를 끊임없이 전염시키며 자신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 있다면 『미래를 만든 Geeks』는 그러한 측면에서 가치가 있는 책이다. 진정한 혁명은 아직 오지 않았지만 혁명을 꿈꾸는 자들은 곳곳에 숨어있다.

P. S.  위의 글은『미래를 만든  Geeks』를 번역하신 송우일님이 월간「마이크로소프트」에 쓰신 내용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