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ll Buxton이 쓴 <Sketching User Experience>의 번역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원서로는 사용자 경험 업계(?)에서 너무나 유명한 책이어서 사뭇 소개한다는 게 좀 뭐하지만, 혹시라도 번역서를 기다리시는 분들이 계실지 몰라 맛보기로 한두 꼭지 소개하려 합니다.

이 책의 구성은, 1부는 비교적 이론적인 거, 2부는 비교적 실용적인 거를 다룹니다.
아무래도 이 블로그를 보시는 분들이야 이론보다는 실용적인 거를 보고 싶어하시지 않을까 합니다만 1부와 2부에서 비교적 길지 않은 거루 한 꼭지씩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번에 올릴 원서의 꼭지 제목은 <Sketches are not Prototypes>입니다. 아시는 분들이야 뭐 당연한 거 아냐? 하실지 몰라도 비교적 짧은 글이지만 Bill의 내공이 묻어 나는 거 같아 올려봅니다. 함 보시죠.
스케치는 프로토타입이 아니다 
연습만큼 훌륭한 선생님은 없다. 
-퍼블리어스 사이러스
인터랙션 디자인에서의 스케치란 무엇인지 간단히 살펴봤다. 그렇다면 다음과 같은 의문점이 남는다. “인터랙션 디자인에서 스케치란 프로토타입과 동일한 것인가? 저 수준low-fidelity 프로토타입과 같은 것인가?” 그 답은 “아니다!”이다. 스케치와 프로토타입의 차이는 너무 명확하다. 적어도 내게는 그렇다.
디자인 콘셉트를 탐색할 때 스케치와 프로토타입 어느 쪽도 활용할 수 있다. 하지만 스케치와 프로토타입을 제작하는 목적은 서로 다르다. 두 방법은 디자인 프로세스의 다른 단계에서 적용된다. 스케치는 초기 아이디어를 탐색할 때 사용한다. 반면 프로토타입은 주로 후반부에 활용하게 된다.
디자인 콘셉트가 좁혀지고 명확해지는 단계에서 프로토타입을 제작한다. 스케치와 프로토타입은 비용과 시기, 제작 분량 등 여러 요소에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물을 얼마나 쉽게 폐기할 수 있는지도 달라진다.
프로토타입은 스케치보다 제작하는데 더 많은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그만큼 적은 수의 프로토타입을 제작하게 되고, 그 결과물을 쉽게 버릴 수 없다. 한 번 제작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이다.
디자인 프로세스의 초반부에는 여러 콘셉트를 탐색해야 한다. 아이디어는 아직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이때는 스케치가 적절한 방법이다.

그림 51: 시간 흐름에 따른 디자인 깔때기의 역동성

위의 내용은 그림 51에 잘 나타나 있다. 사용자 중심의 프로세스에서는 각 단계가 반복적으로 이뤄진다. 둥근 화살표가 이를 보여주고 있다. 초기 단계에는 스케치를 중점적으로 진행하다가 후반부에는 프로토타입으로 이동하게 된다. 색상 변화가 이 점을 잘 나타내고 있다. 또한 그래프의 색상은 아이디어를 창출하는 단계에서 사용성 테스트로 옮겨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관리자의 관점에서 그림 51을 살펴보자. 가장 중요한 요소는 위로 상승하는 붉은 화살표일 것이다. 이 화살표는 디자인 콘셉트와 아이디어를 판단하는 평가 기준을 의미한다. 각 아이디어에 들어가는 시간과 노력에 따라 콘셉트를 선택하거나 폐기하는 기준이 달라진다.
프로세스의 초기 단계에는 콘셉트를 설정하는 비용이 매우 저렴하다. 쉽게 얻은 만큼 쉽게 폐기할 수 있다. 아이디어의 개수가 많을수록 좋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콘셉트 하나에 들어가는 노력은 점점 커진다.
각 아이디어를 평가하는데 좀 더 명확하고 구체적인 기준이 요구된다. 어떤 아이디어를 선택하고 어떤 콘셉트를 폐기할 것인지, 어디에 좀 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할 것인지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
프로세스의 초기 단계에는 제품에 들어가는 투자비용이 적다. 이때야 말로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탐색하고, 새로운 내용을 배우고, 즐겁게 놀아볼 수 있는 단계다. 여러 콘셉트를 시도해보고 제품에 대해서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처음부터 완성 제품의 세부사항에 대해 고민하는 것은 오히려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빌 브랜든이 블로그에 쓴 글을 살펴보자. 이 글은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요점을 명확하게 전달한다.
스케치                              프로토타입
아이디어를 자극하는              디자인을 결정짓는
제안하는                              설명하는
탐색하는                              수정하는
질문하는                              답변하는
시도하는                              점검하는
선동하는                              해결하는
추상적인                              구체적인
애매한                              묘사하는
그림 52. 스케치와 프로토타입 비교
스케치와 프로토타입에는 여러 가지 차이점이 있다. 위 그림은 스케치와 프로토타입을 제작하는 목적과 의도를 잘 보여준다. 이는 스케치에서 프로토타입으로 변화하는 과정이다. 가운데 화살표는 이 과정이 연속적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명확히 흑과 백으로 구분되는 개념이 아니다.
도자기 제작 수업의 첫 날이었다. 교사는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눴다. 교실 왼쪽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오로지 양으로만 성적을 매길 것이고, 교실 오른쪽 학생들은 오로지 질로만 성적을 매길 것이라고 말했다. 성적을 매기는 방법은 아주 간단했다.
‘양’으로 승부를 매기는 그룹은 학기말에 그 동안 만든 도자기의 무게를 재는 것이다. 도자기 무게의 합이 25킬로그램을 넘으면 ‘A’, 20킬로그램을 넘으면 ‘B’를 받는 식이다. 반면 ‘질’로 승부를 내는 그룹은 완벽하게 만든 도자기 하나만 제출하면 됐다.
그런데 학기말에 재미있는 일이 발생했다. 가장 훌륭하게 만들어진 질 좋은 도자기는 ‘양’으로 성적을 받는 그룹에서 나온 것이다. ‘양’으로 승부를 내는 그룹은 수많은 도자기를 만들어 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많은 도자기를 만드는 동안 실수를 거듭하며 결국 훌륭한 도자기를 만드는 법을 배운 것이다.
반면 ‘질’로 승부를 내는 그룹은 책상에 앉아 완벽한 도자기를 만드는 이론을 터득하는 데 시간을 쏟았다. 하지만 굉장한 이론에도 불구하고 엉터리 도자기 밖에는 보여줄 수 없었다.
백스터는 디자인 프로세스의 초기 단계야 말로 투자 대비 기대효과가 높은 때라고 설명했다.  초기 단계에는 투자에 들어가는 비용과 노력이 적고, 여러 가지 가능성을 탐색해 볼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많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양날의 칼과도 같다. 잘못된 결정을 눈치채지 못하고 통과시키거나, 중요한 기회를 놓쳐버리면 그 만큼 나중에 돌아오는 손실도 크기 때문이다(이런 손해는 실제 수익과 직접 연결된다). 이른 단계에 여러 번 실패해야만 더 큰 손실을 막을 수 있다.
매도 먼저 맞는 것이 낫다는 옛말을 기억하자.
하지만 초기 단계에 적절한 투자와 실험을 시도하는 회사는 많지 않다. 특히 소프트웨어 회사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보통 이런 회사는 초기 단계에 디자인에 투자할 만한 자본과 여유가 없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나중에 가서 잘못된 디자인을 수정하느라 발생하는 엄청난 비용은 잘도 지불하곤 한다. 디자인은 엉망이고 출시일도 늦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비용은 처음 사업 계획에는 전혀 책정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초기 단계에 제대로 디자인을 거치지 않았다면 당연한 결과다.
디자인 연구 없이 바로 제품 개발에 착수하는 것은 위험하다. 결국 제품을 어떻게든 완성하고 판매하게 되더라도 고만고만한 제품밖에는 만들 수 없다. 기존의 제품과 차별화된 혁신은 꿈도 꿀 수 없다.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해보지 않고 바로 최종 제품을 만든다고 생각해보자.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
기회가 단 한 번밖에 없다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시도할 수밖에 없다. 위험을 감수하려고 하지도 않고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지도 않는다. 기존에 익숙한 것에서 다른 혁신을 꾀하려고 하지 않는다.
로버트 쿠퍼는 제품을 개발하는 데 다양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과정을 포커게임과 비교한 바 있다. 쿠퍼는 이 과정이 주식을 투자할 때 위험을 감수하는 것과도 유사하다고 말했다. 마이크 백스터는 도박의 법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할 때에는 판돈을 낮게 걸어야 한다. 하지만 상황이 조금씩 분명해지면, 투자도 크게 해야 한다.
14장에서는 디자인 프로세스의 초반부와 후반부에 아이디어와 콘셉트를 다루는 태도가 달라야 한다는 점을 살펴봤다. 큰 그림에서 바라볼 때(디자인, 개발, 영업 등 전반적인 제품 개발 프로세스를 생각할 때)나 작게 생각할 때(디자인을 고민할 때)에 모두 해당하는 말이다. 디자인 측면에서는 초기 단계에 아이디어를 구상하고 스케치를 하는 과정과 후반부에 프로토타입을 제작하는 과정이 전혀 달라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