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ted by 인사이트 2008/07/16 23:05

번역자분들께 “번역하면서 뭐가 제일 어려워요?”라고 질문하면 첫째로 거론하는 게 아마 전문용어의 번역 문제일 겁니다.

예를 들어 ‘evaluate’는 뭐라 번역하면 좋을까요? 보통은 ‘평가하다’라는 단어를 떠올리겠죠?
그러나 ‘얼랭(Erlang)'에선 ‘어떤 것의 값 또는 가치를 구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데, 이런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하는 단어는 뭘까요?

계산? 수행?

그런데 그리 번역하는 데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아래 글을 보시죠.

이 책(『프로그래밍 얼랭(Programming Erlang)』)에서는 원서의 ‘evaluate’를 일관되게 ‘평가’로 번역하였다. 이 책의 번역 초고를 리뷰하는 과정에서 몇몇 리뷰어들이 평가라는 단어가 잘 맞지 않는다고 지적해 주시면서 어느 분은 ‘계산’이라는 용어를, 또 어떤 분은 ‘수행’이라는 용어를, 또 다른 어떤 분은 일률적으로 사용하기보다는 문맥에 따라 다르게 사용하는 게 어떠냐는 지적도 해주셨다. 사실 이 책을 번역하면서 단어를 선정하는 데 있어 가장 많은 고민을 한 단어도 바로 이 evaluate였다. 분명 뜻은 ‘어떤 것의 값 또는 가치를 구하다’라는 의미지만, ‘계산’이라고 하자니 이 책의 여러 곳에서 사용되고 있는 calculate라는 단어와 중복되고, ‘연산’은 operate와, 그리고 ‘수행’은 또 perform이라는 단어가 각각 제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도무지 evaluate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그렇다고 문맥에 따라 다른 용어를 쓰자니 오히려 독자 여러분께 혼란을 줄 수도 있을 거란 생각이 들어, 앞서 번역된 전산학 관련 서적들을 여러 권 참고한 끝에 결국 ‘평가’라고 하였다. 그러니 이 책에서 ‘평가’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지금까지 설명한 내용으로서 평가, 즉 evaluate라는 점을 기억하면서 읽어주시길 부탁드린다.

-『프로그래밍 얼랭(Programming Erlang)』 16쪽 옮긴이 주석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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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이트에서 최근 자바스크립트(JavaScript) 책을 몇 권 발간했고(1, 2), 준비하고 있습니다.(3, 4)

완성된 번역문을 들여다보는데 Unobtrusive라는 단어가 자꾸 눈에 띄더군요. 웹에서 ‘겸손한’으로 번역된 경우를 많이 보아 왔기에(1, 2, 3, 4 등등...) 그러려니 하고 있었는데, 박영록 님은 『프로토타입과 스크립타큘러스』를 번역하시면서 ‘나대지 않는/주제넘지 않는’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기에 질문을 했더니  아래와 같은 취지의 답을 보내 오셨습니다.

현재 공식적으로 정착된 번역어가 없고, 겸손한 자바스크립트라는 표현이 좀 쓰이며, 나대지 않는 자바스크립트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겸손하다는 말이 unobtrusive를 적절하게 반영하지는 못하고, 나대지 않는다는 표현이 오히려 더 와 닿지만 출판용(?)으로 조금 부적절한 감이 있다. 그래서 역자는 주제넘지 않는 자바스크립트라는 표현을 선택했다. 좀 장황한 감이 있어서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

- 『프로토타입과 스크립타큘러스』 옮긴이 글에서

그런데 『자바스크립트 완벽 가이드』를 번역하셨고, 『프로 자바스크립트 테크닉(Pro JavaScript Techniques)』를 번역하고 계신 송인철 님은 또 다른 의견을 내셨습니다.

제 개인적인 의견은, 누군가에게 unobtrusive javascript가 무엇인지 설명을 한 다음에 이런 javascript를 '겸손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에게 잘 와 닿지 않겠다는 겁니다. unobtrusive javascript라는 개념은 자바스크립트와 HTML이 완전히 분리되어서 서로 간섭하거나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개념이고 여기서 당신은 이런 상황을 보면 자바스크립트가 겸손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냐고 말하는 격인데 적절하지 않다고 봅니다.

라고 하시면서 ‘무간섭’라는 번역어를 제시하셨습니다.

이에 대해 박영록 님은 다시 아래와 같은 답을 해오셨고,

‘무간섭’이라는 말을 쓴 의도는 알겠으나 자바스크립트는 HTML을 조작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간섭하지 않는다고 하면 오해를 살 여지가 큰 것 같습니다. 그냥 둘이 한 장소에 섞이지 않는다는 것이지 자바스크립트가 HTML에 간섭하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독립형 자바스크립트, 분리형 자바스크립트 같은 말이 오히려 더 적합할 수도 있는 듯. 하지만, 이 말만 가지고는 unobtrusive의 뉘앙스는 온전히 전달이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송인철, 이동기, 이유원, 황인석 님께선 다시

저희들도 박영록님 의견에 어느 정도 공감합니다. 사실 저희 내부적으로 '무간섭'이란 용어가 나오기 전에 '참견하지 않는 자바스크립트'라는 용어를 사용하기로 결정한 적도 있습니다. 참견하지 않는다는 말이나 주제넘지 않는다는 말이나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박영록 님께서도 지적하신 대로 용어로서는 적절하지 않는 것 같아서 결국 '무간섭'이라는 용어를 쓰기로 결정했던 것입니다.

이라고 의견을 다시 정리하셨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겸손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던 김석준 님께 의견을 요청해 봤습니다.

흔히 Unobtrusive JavaScript라고 부를 때의 ‘Unobtrusive’는 Progressive Enhancement(점진적 개선)라고 하는 웹 개발 방법론과 함께 이야기되는 것입니다. 즉, 자바스크립트가, 자바스크립트가 들어가서는 안 될 곳까지 침범하여 ‘무례하게’ HTML 코드의 아무 곳에나 막 들어가던 방식에 대응하여, 자바스크립트가 원래의 기능인, 웹페이지에서 동작(behavior)을 담당하는 부분에만, 그것도 기존의 웹 페이지의 기능을 개선(enhance)하는 방향으로만 들어가도록 하자는 생각내지는 개발 방식입니다. 이렇게 의미를 이해하고 나서 Unobtrusive를 다시 생각해 보면, '주제넘지 않는'이란 표현은 아주 적절해 보입니다. 다만 영어의 한 단어를 우리말의 구로 표현하는 게 조금 걸린다면, '충실한 자바스크립트' 나 '겸손한 자바스크립트' 정도로 표현할 수도 있을 겁니다. 참, 그리고 많은 분들은 시쳇말로 '나대지 않는 자바스크립트'라고 부르기도 한답니다.^^

여러분의 의견은 어떠세요?

이런 고민과 논의 과정을 통해 제대로 의미를 전달하는 우리말을 찾을 수 있다면 저희로선 큰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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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프로토타입과 스크립타큘러스』를 번역하시면서 박영록 님께서 번역어를 고민하셨던 용어들을 옮긴이의 글에서 정리하셨기에, 여기 올립니다.

* argument, parameter: 비슷한 의미를 지니며 이 책에서도 일부 혼용해서 쓰고 있는데 함수의 경우에는 인자로, URL의 parameter는 파라미터로 번역했다.
* array : 배열로 번역했는데 자바스크립트 Array의 인스턴스라는 걸 강조해야 하는 경우에는 Array 객체로 번역했다.

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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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행복한 고니 님은 비(非)남용, 비간섭, 비돌출 이라는 표현을 놓고 고민하고 계시네요.


댓글을 달아 주세요

  1. iolo 2008/07/17 15:37  Addr  Edit/Del  Reply

    저도 비슷한 번역을 하면서 고민했었는데...
    http://iolothebard.tistory.com/339
    결론은.. "조신한" 자바스크립트였죠. -.-;;;;

  2. 새발 2008/07/21 22:05  Addr  Edit/Del  Reply

    최근에는 Unobtrusive이란 용어를 쓸데가 없어서 관심을 끄고 있었지만 앞으로 기회가 온다면 '절제', '절제된'이라는 말을 쓰려고 생각중입니다. 非나 不이 들어간 단어는 의미를 전달하기에 적합하지만 좀 어려워 보여서...고민이 됩니다.

  3. 낭망백수 2008/10/14 22:54  Addr  Edit/Del  Reply

    관련된 두어개 포스트를 읽고선 처음엔 '참한' 이라는 느낌이 들었는데,
    이건 '알차다'라는 의미가 강해서, '점잖은' 이라는 의미가 더 알맞다는 생각입니다.
    문제는 거꾸로 영역을 해도 영어권에 의미가 제대로 전달될지가 의문입니니다.

    꾸벅~!

    ps; un- 이 접두어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비- 로 시작하는 표현들은 왠지 꺼려집니다. ^^;

  4. SCRIPTWIN 2008/10/26 03:07  Addr  Edit/Del  Reply

    비(非)남용, 비간섭, 비돌출, 무간섭, 겸손한....다 뉘앙스는 같지만..
    비남용은 그 의미가 좀 더 멀어지는 느낌이고..
    비간섭은 무엇을 설명하려는 것은 알겠으나....
    비돌출이라는 말도 의미 전달이 겸손한과 다르지 않지만.. 더 어렵고..
    그나마 무간섭이 좀 쉽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의미전달에 오해가 있을 수 있네요..

    그래서 저는 '간접' 이라는 말이 적당하게 느껴지네요..
    간접 실행하다, 간접 경험을 하다..
    직접 관여하는 코드도.. 그렇다고 관여하지 않는 코드도 아닌..
    둘 사이를 메어 줄 의미에서 '간접' 밖에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참고] '간섭'과 '간접'은 다릅니다..


    Unobtrusive JavaScript : 간접 JAVASCRIPT

  5. 공간 2008/12/10 16:46  Addr  Edit/Del  Reply

    좀 지난 글이지만, 많은 배움이 있군요.
    번역하시는 분들이 단어 하나에도 그렇게 많은 고민을 하는지 첨 알았습니다. ^^;
    저같이 무지몽매한 사람한테는 정말 감사할 따름이죠.
    글 잘 보고 갑니다. ^^